Artist Note and Criticism

  • title
    SeMA 2008 미술을 바라보는 네 가지 방식 - 상상의 틈, 괴물 되기
  • critic
    강효연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 Date
    2008.03.28

 Yu Jin, Sung-SeMA 2008-강효연.pdf



상상의 틈, 괴물 되기   

 

강효연(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이번 섹션에서는 사회, 문화적 상황에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반응하는 작가들을 소개한다. 이들은 그에 대한 변화의 목소리를 내기 보다는 돌연변이나 괴물 등, 일반인들의 상상이 불가능한 이미지와 형상으로 세상의 또 다른 개체로서 소통하기를 원하는 작가들이다.

최근 1세기의 문화형성과정은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수용해 가면서도 적지 않은 마찰과 변이를 낳았고, 이러한 현상은 이 시대 작가들의 반응으로써 주목하게 된다. 특히, 변이가 자연발생적인 현상이 아닌 부작용의 결과물이자 괴물로 표현되어지는 이시대의 비정상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작가는 스스로 ‘괴물 되기’를 자처함으로써 자유를 향한 탈출구 내지는 카타르시스적 의미를 찾아가는 시도를 한다.

 

주관적이고 감성적이며, 개성과 자아를 표출하는 젊은 작가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자 세상을 향한 외침이다. 소외된 육체의 은유, 히스테리의 도상학, 서로 무관한 이미지가 하나로 뭉쳐지는 그로테스크(이상한)한 이미지, 식물성과 동물성의 결합 등 괴이하면서도 애틋한, 때로는 재밌게 느껴지는 작품들은 작가들이 채집자와도 같이 수집한 다양한 이미지를 변형시키는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예술과 과학, 미학적인 것과 인류학적인 것의 경계는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다.’라고 한 제임스 클리포드의 말처럼 작가들은 채집자와도 같이 수집한 문화전반의 다양한 내용의 것들을 조합하고 분해하며 다시 그것들을 재구성하는 작업과정을 거치면서 동시대 미술의 한 영역으로 소개한다.

‘상상’의 틈새를 비집고 나온 ‘괴물’의 이미지는 나무의 틈 사이에서 자라나는 이끼와도 같고, 자연 발생적으로 생성된 현상처럼 이 세상의 일부분으로써 다른 개체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그럼, 왜 ‘괴물 되기’일까. 여기서 이것은 진화론적 의미의 ‘되기’는 아니다. 통상적으로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 존재적 의미나 무리를 형성하는 ‘되기’를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자연과 문화 간의 연속성 상에서 발생되는 생성의 의미, 바로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말하는 결연의 관계 : 공생,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 새로운 의미의 탄생(생명력)을-돌연변이의 탄생, 괴물의 탄생을- 말하는 것이다.

 

괴물의 이미지는 또한 플라톤의 향연에 등장하는 앤드로기니에(androgyne:자웅동체)와도 같이 태초의 근원적인 부분에 의문을 제기한다. 오늘 날에 와서는 성의 개념에서 젠더(gender)의 의미로 전환되면서 단순히 생물학적 혹은 사회적 구조가 만들어낸 개개인의 역할과 고정관념에서 비롯되어 습성화된 개체의 이미지로 분리시키고 단정 지어 해석하는 예는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개개인의 특수성을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의 ‘비정상인들(Les anormaux)’이란 책을 보면 다양한 인간의 이미지, 특히 비정상적으로 평가되어진 사람들, 괴물의 예를 소개한다. 푸코는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규정지은 틀에서 벗어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비정상인, 정신이상자 또는 괴물로 치부했던 시대를 예로 들면서 사회구조의 집단적 횡포를 비판한다. 이 책에서는 아주 다양한 비정상인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번전시를 설명하기위해서는 한정지어서 이야기 할 필요가 있겠다. 이때(이 책)에 소개된 내용 중에서 동성애자나 자위행위를 하는 어린아이, 몸이 붙은 쌍둥이 형제에 이르기까지 일반화에서 벗어난 예들을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규범으로 차단하고 형벌을 가함으로써 다수가 정한 사회의 집단화를 정당화했었다. 이러한 예는 바로 사형과 같은 절대적인 형벌로 이어졌고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푸코는 ‘괴물’을 있을 수 있는 이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함께 공존해야 할 이 시대의 동반자로 제안한다. 이러한 제안은 ‘틈(불:la fissure)’의 개념을 낳았고, 이 ‘틈’은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되어질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게 되었다.

 

작가들의 심적 능력인 상상력(想像力)은 몽상(夢想)이나 공상(空想)과는 구별되어 설명되어진다. 특히, 칸트 철학에서 ‘상상력은 감성과 오성을 매개로 인식을 성립시키는 능력’을 말하고, 이번 전시에 소개되어지는 작가들의 작품들은 문화전반의 다양한 요소들을 조합해서 만들어낸 상상의 이미지들이 개인의 감수성으로만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닌 이성과 감성의 이중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럼, 문화란 무엇인가.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사회 구성원에 의해 수세기에 걸쳐 형성된 행동양식이나 생활양식의 과정에서 이룩해 낸 물질적, 정신적 소득을 이르는 말이다.’ 이 시점에서 문화가 소개할 수 있는 범위는 굉장히 광범위하지만 수세기를 거쳐 얻어낸 물질적, 정신적 소득 중에서 물질적 소득은 인간의 편리와 예술적 가치를 추구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신적 소득은 그 범위가 아주 난해하다. 수세기를 걸쳐서 종교와 철학, 이념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다양한 생각들이 난해하게 쏟아져 나왔지만 여전히 전쟁과 살생을 일삼으며 비수를 들이대는 이 사회의 부조리는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이번 섹션에 소개되어지는 작가들은 규정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아주 개인적인 의식으로 하나의 개체로써 인정받기를 바라는 작은 소망을 가진 소소한 사람들이다. 단지, 예술을 하는 작가로써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이해받고 함께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더불어 인권이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우리사회에서 한 개인의 감수성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사회집단의 권위와 이익이 우선하고 여전히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개인적 감성이 짙게 깔려있는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오늘 이 전시장에서 세상과 소통하기를 갈구하는 젊은 작가들의 낯선 이미지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할 것이다. 우리 모두 마음을 열고 돌연변이나 괴물의 의미를 조금만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작가 성유진은 고양이의 이미지와 사람의 이미지를 합체시켜서 표현하는 작가이다. 서울에서 홀로 유학하면서 작가에게 주어진 타향살이는 일상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는 고단함, 외로움, 그리고 불안감 등으로 밀려왔을 것이고 작가는 이러한 상황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게 된다. 작가는 고양이와 함께 생활하면서 고양이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자신의 모습을 고양이에 대체시킴으로써 멜랑꼴리한 자화상을 그려낼 수 있었다. 충혈된 눈, 가느다란 손가락, 늘어진 얼굴, 절름발이와 같이 불안한 형상은 작가 자신의 모습으로 설명되지만 동시에 작가 개인에게만 한정된 이미지가 아닌 사회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타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작가, 개인의 불안한 바이러스는 전염되듯 ‘다양성(la multiplicité)’를 조성한다. 이 ‘다양성’을 우리는 작가의 작품들로 증식, 연속되어지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작가의 불안감이 담겨있는 작품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성향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외적인 요소, 즉 사회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현상으로도 설명할 수 있겠다. 이번 전시에 출품되지 않은 작품 중에서 자화상이기도 한 고양이 캐릭터의 잘려진 귀의 모습을 작품 속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빠르게 번식하는 고양이의 수를 억재하기 위해서 생식기를 잘라내고 이러한 고양이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귀의 일부분을 잘라서 표시한다고 한다. 이는 고양이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행해지는 집단 논리의 안타까운 한 예로써, 이러한 나약한 존재의 의미를 우리 인간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겠다. 또한 작품 속에서 공통되게 발견할 수 있는 왜소하고 연약한 ‘손’의 이미지는 권력의 상징이자 힘의 상징인 손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작가의 손이자 힘없는 약자의 손으로 설명된다.

온 몸이 털로 감싸져 있는 ‘고양이­인간’, 과장된 눈과 기이하게 변형된 몸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의식이 통제하지 못한 잉여들’, 즉 고통과 불안감에서 형성된 괴물의 모습으로 과감하게 표현됨으로서 카타르시스의 예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겠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 그리고 작가들은 공통되게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각각의 작품이 의미하는 바는 각자의 다른 경험과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 표현되어지고 있다. 타이틀에서 언급한 ‘괴물되기’는 괴물이 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존재되어질 수 있고 존재하는 괴물-이상하고 못생겼으며 나약한 우리네 소외 계층, 또는 특이한 개개인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는 모습으로 상징적 의미의 괴물-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는 전시이기를 바란다. ‘틈’을 비집고 나오는 작가들의 상상력은 새로운 가치이자 희망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틈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리라고 본다. 우리 스스로 이 틈을 허용할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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