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Note and Crit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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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적 충만이 성취한 내적 치유 - 성유진의 회화를 읽는 네 개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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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길 | 미술평론가
  • Date
    2009.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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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 충만이 성취한 내적 치유
- 성유진의 회화를 읽는 네 개의 상징


김종길 | 미술평론가


긋다
긋다, 즉 ‘그음’은 일획에서 시작된다. 첫 획을 긋는 행위는 씨알이 터지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 한 번 시작된 그음은 그치지 않고, 한 번 움트기 시작한 싹은 멈추지 않는다. 그치지 않는 획은 이랑을 이루고, 멈추지 않는 싹은 통나무가 된다. 하여, 획과 통나무는 결코 흩어지는 법이 없다. 그러나 석도는 여기서 다시 새로운 사유를 펼친다. 그는 자신의 화론에서 ‘일획’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一劃者 衆有之本 萬相之根”, 일획이란 존재의 바탕이자 만물의 근원이란 뜻이다. 예술학적 해제를 적용하면, “한 획을 그음으로써 유위의 세계, 법의 세계가 출발하니 이것이 곧 예술의 시작”으로 읽힌다. 그는 획과 통나무가 다시 흩어져야 예술이 된다고 보았다. 이 흩어짐의 유위를 거쳐야만 회화가 되고 집이 되기 때문이다. 형호는 『필법기』에서 “형태라는 것은 그 형形을 얻어 그 기氣를 남기는 것이요, 진眞이란 기질이 모두 왕성한 것을 일컫는다. 모든 기는 아름다움을 전하고 형상을 남기는 것이며 상象은 죽는 것”이라고 했다.
획의 유위는 어떠한 상태로든 형을 얻을 수밖에 없고, 그것은 통나무처럼 스스로 존재를 획득한다. 형호가 말하는 ‘기’는 거기서 연유한다. 형의 획득과 기의 전유는 결국 일획에서 비롯된다는 두 사람의 주장은 화론의 핵심적 열쇠말keyword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오래된 화론의 해석을 단지 ‘말’의 뿌리가 아니라 말의 ‘주체’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획의 주체, 씨알의 주체는 곧 화가와 농부 그 자신이다. 석도가 자신의 화론에서 주장한 일획론의 근본적인 이유는 미의 구현보다 ‘자아에 대한 인식’에 있었다.
형호의 ‘상’을 다시 보자. 왜 그는 “모든 기는 아름다움을 전하고 형상을 남기는 것”이라 말하고, “상은 죽는 것”이라 했을까? 여기서 아름다움을 전하는 형상은 곧 ‘회화’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象은, 形과 氣, 眞, 美를 발현시키는 근원적 주체일 터이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데미안』의 아프락사스abraxas로 보면, 形․氣․眞․美는 알을 깨고 나온 새로운 세계이며, 象은 신세계를 위해 파괴된 옛 세계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달리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예술가의 껍질을 깨고 나온다.
예술가는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예술은 미를 향해 날아간다.
그 미의 여신을 아프로디테라고 한다.

상은 곧 예술가 자신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을 위해 영혼을 태우지 않던가. 형호의 필법은 회화적 주체인 작가 자신을 불사르는 행위이며, 궁극적으로 그 자신의 희생을 통해 예술의 완성에 이를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석도 또한 첫 획을 긋는 주체의 자각과 인식을 통해야만 ‘법의 세계’ 곧 예술에 이를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성유진의 회화는 ‘긋기’에서 비롯된다. 그의 회화는 형호가 말한 ‘형’의 완성을 위해 ‘그음’의 이치를 탐색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음이 만들어 낸 세계, 성유진은 그 세계의 풍경을 위해 침묵의 수행을 감행한다. 하여, 그의 회화가 탄생하는 작업실은 그음의 수도원이며 또한 영혼의 안식처라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는 지난 수 년 간 오로지 긋기의 수행을 통해 形․氣․眞․美의 알을 키웠다. 그의 회화는 딱히 어느 단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네 개의 미적 개념을 하나의 화면에서 혼융하고 뒤 섞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자아로의 탈주를 모색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회화적 탈주를 ‘탈아脫我의 미학’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이제 그 탈아의 미학이 길러낸 네 개의 개념(形․氣․眞․美) 속으로 좀 더 깊이 다가가 보자.


성유진의 형은 고양이다. 그리고 이 고양이는 작가의 분신이며, 회화적 화자話者이다. 그의 일획은 고양이를 닮은 비현실적 자아를 구축하기 위해 출발한다. 반복과 지속의 리드미컬한 긋기와 형상의 아웃라인을 놓지 않으려는 의식의 집요한 긴장이 만들어 낸 이 인물은, 침적된 내면의 트라우마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과거, 옛 화가들의 초상이 전신사조傳神寫照의 미학을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인물의 정신을 포착했다면, 성유진은 의인화의 방식으로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의 시각적 실재, 즉 이 인물이 고양이를 얼마나 닮았느냐는 것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는, 내면의 실체를 최대한의 형상으로 구축하기 위해 획을 그었고, 결과적으론 동거동락同居同樂의 일상을 공유했던 자신의 도반道伴 ‘고양이’로 표현되기에 이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큰 눈과 넓은 이마, 작고 명료한 코와 입, 뾰족한 귀, 그리고 검은 머리칼, 길고 여린 손은 인물의 내적 표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 중 눈은 바깥을 인식하기 위한 ‘바라봄’이 아니라 내면의 우주적 풍경을 세상으로 열어 놓은 ‘열린 창’과 같다. 그 창을 묵상하듯 응시하면, 한없이 깊은 은하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의 몸은 어쩌면 은하를 품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우주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 우주는 또한 대지와 같아서 다양한 상징을 싹틔우고 있다.
인물의 머리에선 뿔 같기도 나무 같기도 한 형상들이 자라나고, 때로는 연꽃을 닮은 ‘움’이 돋아나기도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생각’이란 것이 실상은 ‘生角’, 즉 사슴의 뿔로 풀이 된다는 것을 상기하면 그의 회화적 상상력이 얼마나 충만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최근 작품들에선 이전과 달리 인물을 둘러싼 배경이 등장한다. 이 형상들은 잎으로만 이뤄진 숲이다. 그는 큰 나무나 혹은 나무들의 큰 숲이 아니라 아주 작고 여린, 미세한 곤충들의 숲을 보여준다. 이 숲은 바람에 일렁이기도 하고, 고요하며, 또한 잔잔한 물결처럼 흐르는 초현실적 공간이다. 우리가 아주 낮게 다가서지 않으면 결코 볼 수 없는 세계인 셈이다. 이 숲에 둘러싸인 그의 인물들은 숲의 풍경처럼 고요하고 잔잔하며, 더 깊은 심연을 타전한다.


형을 얻어 기를 남기다고 하였으니, 성유진에게 있어 기란 그의 회화들이 뿜어내는 느낌의 총체일 터이다. 그러나 ‘총체’로서의 통합적 느낌이란 것이 역설적으로는 낱낱의 모세혈관을 관통하여야 하는 것이니, 성유진의 회화를 단지 뭉툭한 시각적 아우라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까, 고양이 얼굴의 의인화된 작품들인데, 어딘지 외롭고 쓸쓸하다거나 무섭다, 소름끼친다, 슬프다 따위의 감성적 소감이야말로 성유진의 회화적 실체와는 하등 관련이 없다. 그것은 문득 바라본 이미지의 아우라일 뿐이다. 그러니 이 아우라를 기라 말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가 아닐까.
그의 작품들은 수 천 수만의 획들이 덩어리가 되고, 형상이 되는 과정을 지난하게 거쳐 완성된. 그리고 그 획들은 자율적 리듬을 타고 지그재그로 또는 둥글게, 아니면 그물망처럼 얽히고 설켜서 그어지는 선들이 아니다. 그의 선은 반드시 일정한 흐름과 방향을 타고 그어진다. 인물만을 두고 보면, 그의 선들은 얼굴의 중앙인 코에서 사방팔방으로 확장되듯 그어지며, 선의 파장은 이 확장선을 타고 ‘바깥’에 이른다. 그러므로 그의 형상은 바깥을 향한 선들이 쌓여서 드러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형상들은 똑 같은 캐릭터들이 동어반복처럼 등장하는 단순한 구조로 볼 수도 있으나, 획의 흩어짐과 응집에 의해 사라짐과 드러남을 예시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의 작품들은 ‘존재 결정론’을 부정한다. 마치 유사 결정론을 차용한 그의 개념은 고양이 형상에 함정이 있는 셈이다. 획의 응결에 의한 형상화가 고양이로 나타났을 뿐 그 본질은 하나의 획에 대한 그의 의지인 것이다. 형을 얻고 그가 남긴 기는 결국 획 그 자체이며, 그런 획이 응결하여 형상을 이룬 ‘내적 자아’일 터이다.


기와 진은 둘이 아니면서 둘이다. 진은 ‘기(질)의 충만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획=내적 자아”의 충만함이란 진을 형성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미학이다. 충만, 바로 거기에 진의 핵심이 있다. 그러므로 진은 상象과 대치될 수밖에 없다. 충만에 이른다는 것은 주체의 해체와 영혼의 소진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유진은 무엇보다 이 진을 집요하게 파고듦으로써 상의 죽음이나 파괴, 소멸의 요구를 치유의 상황으로 역전시키고 있다.
그는 상처받은 자아의 표상을 회화로 쏟아내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자폐에 가까운 ‘자기 소외’를 추궁하며 열린 세계의 소통을 꿈꿨던 그는 ‘그리기’의 언어로 대화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회화적 충만에 이르면 이를수록 그의 상처는 치유되었고, 혼돈에 찬 내면은 안정을 되찾았다.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를 시차적 관점으로 바라보면, 그의 작품들이 얼마나 변화되어 왔는지, 얼마나 내적 안정을 이루어 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진의 충만은 곧 내적 투쟁과 어루만짐의 과정이었을 터이다. 그 자신에 대한 우정과 환대 없이 어떻게 충만의 역사를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그가 성취한 ‘자아’에의 우정에, 환대에 깊은 긍정의 응원을 보낼 필요가 있다. 나는 모든 예술은 자기 치유화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한다. 성유진에게 있어 회화는 바로 그 길의 꽃들이며, 신발이고, 기쁨인지 모른다.


그것은 형과 기, 진이 제 삶의 언어로 혼합된 힘이다. 그 힘의 언어에 도달하는 것이 모든 예술가들의 궁극적 소망일 터이고, 성유진도 예외일 수 없다. 그리고 그 힘의 기세를 판단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예술가는 그가 궁구한 만큼의 힘을 가지겠지만, 언제든 그것은 추락할 수 있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비상할 수도 있다.
이제 네 개의 상징을 품었던 상이 남는다. 象, 그것은 미의 탄생 뒤에 남는 빈 허물이지만, 결코 죽지 않는 예술의 주체이다. 상은 곧 성유진 자신이고, 우리 모두다. 그런데 나는 네 개의 상징보다 이 상의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상이 없이는 예술이 결코 탄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이 없는 형과 기, 진, 미를 상상할 수 있는가? 보라, 상은 형과 결합해 형상이 되고, 기와 결합해 기상이 되며, 진상, 미상이 된다.

성유진의 회화는 슬픔이 기쁨에게, 기쁨이 슬픔에게 내미는 손과 같다. 그의 손은 끝없이 펼쳐지는 획으로 예술의 손을 그렸고, 의미화 했다. 그는 그의 작품과 손잡고 아름다움과 형상을 전하려 한다. 우린 모두 그 앞에서 이방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에게로 손을 내미는 순간 그의 작품들은 ‘빈 허물’을 이기고, 새 몸을 얻게 될 것이다. 그가 지금까지 ‘외딴 방’에 자신을 가두고 펼쳐 온 예술적 힘은 바로 거기에 있지 않겠는가.
성유진의 예술세계는 이제 어떤 전환의 시점에 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들이 내적 혼돈을 거친 뒤 다시 새 면모를 보이고 있는 이번 전시작들은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전환과 변화를 통한 미의 모색이 ‘자아의 정치성’을 상실할 때 오는 느슨함은 경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의 작품들이 외적으로는 보다 성숙된 필치를 내 뿜고, 내적으론 평온을 되찾았다고 해서 위에서 살핀 네 개의 상징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닐 터이다. 역설적이게도 예술은 위험과 불안, 공포와 억압의 시대에 더 위대한 미학을 피워 올렸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의 회화가 ‘내적 자아’에서 ‘사회적 자아’로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나는 나로부터의 나이기도 하지만, 그 나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사회적 나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의 치유를 통한 사회적 치유의 가능성, 어쩌면 소통의 출구는 거기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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