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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작가 : 서평주, 성유진, 송호준, 여상희, 오재우
2016.7.28 ~ 2016.8.14
인디아트홀 공
http://www.gongcraft.net/



<세 번째 공포 : 고리>

이인복

 

<세 번째 공포 : 고리>는 원자력에 대한 전시다. 이 전시는 두 번째 전시 주제인 ‘자본’에서 갈래를 더 뻗어가 자본주의 사회와 정치가 기술 반전에 얼마나 관대한지를 이야기한다. 이는 ‘자본’이 추구하는 물질적 속성과 관련이 깊다. 다양한 가치들을 저울질하고 선택하는 단계에서 자본은 언제나 수익성과 효율성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관대함이 정작 기술 발전으로 인한 막대한 영향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순간 발생한다. 엄청난 에너지 소비량으로 고심하는 자본의 세계에 효율적 해법으로 군림해온 원자력 역시 마찬가지다. 고리 원자력 발전소는 이미 수명을 넘겼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묘할 정도로 평온하다. 원자력이 가져올 수 있는 위협에 대해 불안해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남의 일이다. 어디까지나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일 뿐이다. 후쿠시마는 우리에게 실재가 아닌 화면 속의 이미지로만 남았다. 이번 전시는 이 이미지를 현재, 지금 여기의 것으로 끌어온다. 평온한 고리 풍경의 이면에 허탈과 무기력만이 남았음을, 목청을 높여봐야 들리지도 않았던 문제를 다시금 환기하려 한다. 이를 통해 잠재적 위험으로만 인식되어온 원자력, 그리고 그 속에 존재하는 비상식적 안도감의 사회에 균열을 내고자 한다.

 

동일본 대지진 이전 원자력의 위험성은 말 그대로 ‘잠재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체르노빌 사태를 한 차례 겪으면서 인류가 생존을 위해 사용하는 거대한 힘이 인류 전체의 존속을 위험하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났지만 이후 광풍처럼 일어난 ‘원전 르네상스’로 인해 이같은 위험은 망각의 시간을 지나왔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전사태 이후 위험성은 현실적 공포로 전환되었다. 독일은 후쿠시마 사태를 본 후 2022년까지 원전을 완전히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원자력 발전소 폐쇄를 주장하면서 25만 명의 군중이 집회에 모였으며, 프랑스에서도 같은 내용의 집회가 열렸다.

 

반면 한국은 어떤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지식경제부 장관은 ‘원전 확대, 수정할 계획 없다’라는 입장을 표했다. 지정학적으로 후쿠시마와 가장 가까운 나라임에도 원전 확대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이에 반해 대중들은 고리 지역의 짙은 해무 같은 불안 속에 잠겨 있다. ‘원자력의 위험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열에 아홉은 스스럼없이 ‘체르노빌’,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 등의 단어를 사용하며 자신이 보고 들은 원자력의 피해에 대해 쉽사리 이야기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일부는 신재생 에너지의 계발 등을 언급하며 꽤 미래 지향적인 주장까지 이어갈 것이다. 원자력에 무지한 사람이라도 후쿠시마 농수산물의 수입은 명확한 반대의 관점을 갖는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원자력이 더는 ‘인류가 통제 가능한 불’이 아님을 분명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수명이 다한 고리 원전을 보면서 ‘지금까지 큰 문제는 없었으니까. 앞으로도 별일 없겠지’라는 막연함에 사로잡혀 있다. 물론 소비의 사회에서 생산 방식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향수를 뿌리며 동물 학살을, 에어컨을 작동시키며 온실가스를 걱정하기란 쉽지 않다. 간단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직접 닥친 일이 아니다. 고리 역시 같은 맥락에 위치한다. 동물 학살도, 온실가스도, 원자력도 우리에게 그저 잠재적인 위협일 뿐이다. 그러나 잠재적 위험이 당위성을 부여받는 순간, 잠재적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던 미래의 시점이 현재에 발생했을 때, 현실은 공포의 무대가 된다.

 

이번 전시에서 5인의 참여 작가들은 직접 고리를 답사해 실존하는 위험을 포착했다. 앞서 고백하자면 기획 단계의 참여 작가들 역시 원전에 대한 막연한 불안만을 가진 상태였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도의 불안감이었다. 하지만 6개월의 시간 동안 관련 서적을 읽고, 자료를 탐구하면서 원자력이 가진 실존적 공포를 마주했다. 모두가 가면무도회 속에서 짐짓 불안을 숨기고 있었다면, 작가들은 가면에 감춰져있던 두려움의 표정을 그대로 보이고자 한다. 동시에 그 이면에 존재하는 사회적 상황과 원전 주변에 존재하는 기운과 에너지를 가져와 각자의 방식으로 은폐된 것을 탄로한다. 여기에 더해 비가시적인 것들을 가시화하면서 관객들에게 공포를 대면하게 되는 상황을 만든다. 이는 초자연적 현상, 폭력적인 상황 등이 자아내던 기존의 공포 양식과는 다른 양식이다. 아직 미실현의 상태 속에서 그 가능성만을 품고 있던 위험이 현실화되는 순간 관객들이 자연스레 공포의 감각을 일깨우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무력감에 빠져 있는 위기의식에 다시금 에너지를 불어넣고, 허무로 귀결되는 집단적 행동의 방향이 전환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동시대 사회가 예술에 기대하는 것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서평주

한국에서 반복되는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세월호와 같은 대형사고, 혹은 용산, 대추리, 강정, 밀양, 사드와 같은 논란의 과정들을 바라보면 '한국형'이라는 의미는 다들 충분희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ㅣ작업은 만약에 "원전 사고가 난다면" 이라는 가정을 하고, 재난의 과정을 세월호의 타임라인에 적용시킨 것이다. 이 작업이 말도 안되는 '한국형 재난 소설'에 그치길 바랄뿐이다.



성유진

고대 발달한 문명이 원자력에 의해 멸망했다고 주장하는 글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너무나 먼 과거의 시대에 원자력으로 문명이 수차례 무너짐을 반복하지 않았을까?

이번 작업은 원자력에 의해 기억되지 못한 문명의 탄생과 소멸의 반복을 고대 벽화의 형식을 통해 기록으로 재시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송호준

우라늄에 대해 알아 갈수록 동정심이 생긴다. 안정적이고 싶어 절실하게 입자와 파장을 내뿜는 모습이 우리의 불안한 모습과 같아 보인다.

그런 너희들을 한곳에 모아 더욱더 불안하게 그리고 그 상태를 유지시키려는 장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과 너무도 닮아 보인다.

우라늄아, 니 잘못이 아니다. 안아주지 못해 미안해.


여상희

생명과 도시를 순식간에 집어 삼키는 핵의 파괴력은 아이러니 하게도 세상헤서 가장 아름다운 버섯 구름과 섬광을 내뿜는다. 여기 이 백색의 공간은 망각하고 감추는 세상의 모든 파괴, 폭력, 독이 되는 요소들이 있다. 아름다움과 파괴의 공존, 이 이중성을 통해 공포의 전야를 나타내고자 한다.

버섯이 자라나 포자가 날려 번식하듯 파괴의 공포는 이 세상 구석구석 자라나기에.



오재우

이미지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내가 위치한 곳은 보이지 않는 것들로 둘러싸인 곳, 보이지 않는 곳이다. 나는 한국의 원전들을 찾아 보았거, 그것들은 보이지 않았따. 원전을 본다고 해서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전을 보러 가게 되었다. 공포에 맞서고, 보이지 않는 것에 맞서는 방법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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